길을 내어준다는 것
임현영
일상을 지탱하는 것들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조금은 비참한 일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이러한 행위가 보통은 매일의 사소함에 대한 왜곡된 옹호로 변질되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상의 중요성을 부르짖을수록 역설적으로 그 크기는 우리 안에서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에 있다. 그럼에도 일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말로,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라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언젠가 집 근처의 하천을 걸으며 이런 부류의 생각을 했다. 일상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간신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더는 이렇게 “지낼” 수 없음을 인지한 후였다. “지내다”라는 동사는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상태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당시 나는 아무것도 보내고 있지 못했고 오히려 잃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편에 가까웠다. 잘 지내려면 우선 생존해있어야 하고, 생존해있으려면 무엇이든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명제에 한 발 다가선 것은 그 후로도 몇 차례의 계절을 놓치듯이 흘려보내고 나서였다.
김옥정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무언가를 수집하는 일뿐만 아니라 흘려보내는 일에도 무척 능숙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전시 《이야기하는 풍경》에서 그 대상은 풍경이며, 범주는 해, 달, 나무와 같은 구체적인 자연물이 예시하는 일상의 풍경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풍경은 캔버스 프레임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와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작가에 의해 포착되고 적당한 크기로 재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작가가 그려낸 풍경들은 오랜 기간 사진첩 한쪽에 묵혀둔 이미지 파편, 혹은 우연히 마주친 것이 전부인 채로 시간만 흐르다 또 다른 우연으로 인해 비로소 발견된 일상의 면면일 뿐, 애초에 그는 그림에 걸맞은 풍경을 미리 정의한다든지, 풍경이 취하게 될 최종 형태나 존재 방식을 염두에 둔 적이 없다. 마치 풍경을 그리려던 것이 아닌 이처럼, 그는 어떠한 장면도, 어떠한 순간도 노리지 않고 공평하게 자신을 스치는 시간의 흐름을 그것이 흐르는 대로 놓아둔다. 비유하기를, 기록해둘만한 순간이 지나쳐가는 것이 아쉬워 연속적으로 정지버튼을 누르며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작가는 그와 반대로 러닝타임이 종료될 때까지 무수한 프레임들이 자신의 시간을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끝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때 목격할 장면들이 지금 자신이 본 장면들과 결코 같을 수 없음을 파악하고 있는 자이기도 하다.
한편, 선행하는 흘려보내기와 그 뒤를 잇는 재방문의 메커니즘은 김옥정의 일상과 작업을 관통하는 매개의 형식으로서, 그에게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 정확히 말해 자아의 형상을 그리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풍경은 “모든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작가와) 함께”1) 한다. 따라서 사계절을 보내며 안구에 누적된 이미지 중 유독 눈에 밟히는 풍경을 찾아 되돌아가는 일은 그의 마음의 서가에 꽂힌 수백수천 가지의 책갈피를 더듬어 뒤적거리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작가가 주우려는 대상은 “제법 뚜렷하고 그럴 법한 기쁨의 파편”2)이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빈약한, 그렇지만 가느다랗게라도 꾸준히 이어지는 실타래의 한 부분이자 그래서 삶의 본질과는 더욱 가까울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해 지는 시간의 저녁놀이나 달이 뜬 밤하늘, 매일 밤 산책을 하면서 보는 가로수에 관심이 닿는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인상으로 뇌리에 남기 때문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풍경의 유일한 목격자로서 그가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3)이라 명명한 조용한 역동성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이는 풍경을 객관화 혹은 낭만화하는 대신 확정 불가능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해와 달을 에워싼 공기와 그 주위로 둥글게 반사되는 빛무리, 춤을 추듯 사정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상은 쌓아올린 붓터치에 의해 얼룩진 땀처럼, 때로는 물결치는 파도처럼 종이 위에 맺힌다. 이 불확실한 항해의 제스처는 흐르던 것들을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세우기도, 정지되어 있던 것들을 앞으로 밀어 나르기도 하며 강제적 결속이 아닌 느슨한 공명의 여파 안에서 자아와 풍경을 함께 꿰어 조형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작가만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보다 앞서 “풍경이 이야기한다”는 표현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 궁구해본다면, 가능한 답변의 기저에 있는 작가의 공통된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다. 그것은 시간이란 이야기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당위성에 근거한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아가는 흐름을 가졌기에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삶 속에 내재한 플롯. 새삼 그 순간에 그곳에 있었기에 들을 수 있었던 대단치 않은 목소리이자, 해와 달을 살찌웠다 야위게 하고, 절기마다 다른 별자리로 하늘을 수놓는 보이지 않는 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목소리와 힘은 “마음대로 잡히지 않아 아름답”4)고, 작가는 그리기로서 이 아름다움을, 발화를, 의지를 무한정 연장하고자 한다. 이것이 김옥정의 작업에서 시간과 이야기, 그리기가 갖는 상관관계이다. 작가에게 그리기란 일상의 덧없는 경험에 서사 구조를 덧입혀 의미에 이르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무의미의 충만함이 어디까지 전개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막연한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작가는 세상이 우리에게 문득 속삭인 이야기의 파편들, 시간의 압력에 의해 빠르게 흩어지는 그 낱말 조각들을 다시 배치해 새로운 문장을 구성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그의 그림은 모든 이가 궁금해하지만 묻기를 주저하는 질문과, 지연되었지만 성실하게 고안된 답변 사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경로를 주파해낸다.
전시장 벽을 따라 걸려있는 그림들 속의 풍경을 나는 현실에서도 몇 차례씩 마주한다. 생존을 위해 시작했던 걷기는 이제 일상의 일부가 되어, 삶의 많은 부분이 걷기에 의해 촉발되고 또 종결되기도 한다. 그렇게 걸어가듯 살아가는 시간은 낮이면서 밤인 시간이었고, 도착지와 출발지가 이어져 있는 여정이었으며, 그 여정은 가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여정과 맞물리면서 세상의 외양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주기도 했다. 이처럼 밖에서 보이는 것들이 나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합류하였을 때, 그러니까 외양 중 어떤 것이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내 안의 길을 따라 흐르”5)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배회하며 흘려보낸 시간만큼의 아름다움을 간신히 잡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서, 멀리서, 순서를 정해두지 않고 그림들 사이를 지나가 보자. 그리하여 김옥정이 그려낸 풍경 앞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잘 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러다 우연히 얼마 전 살아낸 것과 같은 풍경을 목격한다면, 그리고 그 풍경이 실은 수많은 세월을 견뎌온 그러한 풍경이라면, 당신도 풍경도 잘 “지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것이 적어도 일상에 대한 의심을 그림에 대한 확신으로 바꾸며 지내온 작가의 시간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되리라 기대하며.
1) 전시 기획안 참고
2) 필리프 자코테, 『초록 수첩』, 류재화 옮김(서울: 난다, 2025), 11.
3) 전시 기획안 참고
4) 필리프 자코테, 같은 책, 44.
5) 같은 책, 215.
임현영
일상을 지탱하는 것들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조금은 비참한 일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이러한 행위가 보통은 매일의 사소함에 대한 왜곡된 옹호로 변질되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상의 중요성을 부르짖을수록 역설적으로 그 크기는 우리 안에서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에 있다. 그럼에도 일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말로,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라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언젠가 집 근처의 하천을 걸으며 이런 부류의 생각을 했다. 일상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간신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더는 이렇게 “지낼” 수 없음을 인지한 후였다. “지내다”라는 동사는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상태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당시 나는 아무것도 보내고 있지 못했고 오히려 잃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편에 가까웠다. 잘 지내려면 우선 생존해있어야 하고, 생존해있으려면 무엇이든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명제에 한 발 다가선 것은 그 후로도 몇 차례의 계절을 놓치듯이 흘려보내고 나서였다.
김옥정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무언가를 수집하는 일뿐만 아니라 흘려보내는 일에도 무척 능숙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전시 《이야기하는 풍경》에서 그 대상은 풍경이며, 범주는 해, 달, 나무와 같은 구체적인 자연물이 예시하는 일상의 풍경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풍경은 캔버스 프레임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와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작가에 의해 포착되고 적당한 크기로 재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작가가 그려낸 풍경들은 오랜 기간 사진첩 한쪽에 묵혀둔 이미지 파편, 혹은 우연히 마주친 것이 전부인 채로 시간만 흐르다 또 다른 우연으로 인해 비로소 발견된 일상의 면면일 뿐, 애초에 그는 그림에 걸맞은 풍경을 미리 정의한다든지, 풍경이 취하게 될 최종 형태나 존재 방식을 염두에 둔 적이 없다. 마치 풍경을 그리려던 것이 아닌 이처럼, 그는 어떠한 장면도, 어떠한 순간도 노리지 않고 공평하게 자신을 스치는 시간의 흐름을 그것이 흐르는 대로 놓아둔다. 비유하기를, 기록해둘만한 순간이 지나쳐가는 것이 아쉬워 연속적으로 정지버튼을 누르며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작가는 그와 반대로 러닝타임이 종료될 때까지 무수한 프레임들이 자신의 시간을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끝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때 목격할 장면들이 지금 자신이 본 장면들과 결코 같을 수 없음을 파악하고 있는 자이기도 하다.
한편, 선행하는 흘려보내기와 그 뒤를 잇는 재방문의 메커니즘은 김옥정의 일상과 작업을 관통하는 매개의 형식으로서, 그에게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 정확히 말해 자아의 형상을 그리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풍경은 “모든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작가와) 함께”1) 한다. 따라서 사계절을 보내며 안구에 누적된 이미지 중 유독 눈에 밟히는 풍경을 찾아 되돌아가는 일은 그의 마음의 서가에 꽂힌 수백수천 가지의 책갈피를 더듬어 뒤적거리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작가가 주우려는 대상은 “제법 뚜렷하고 그럴 법한 기쁨의 파편”2)이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빈약한, 그렇지만 가느다랗게라도 꾸준히 이어지는 실타래의 한 부분이자 그래서 삶의 본질과는 더욱 가까울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해 지는 시간의 저녁놀이나 달이 뜬 밤하늘, 매일 밤 산책을 하면서 보는 가로수에 관심이 닿는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인상으로 뇌리에 남기 때문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풍경의 유일한 목격자로서 그가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3)이라 명명한 조용한 역동성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이는 풍경을 객관화 혹은 낭만화하는 대신 확정 불가능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해와 달을 에워싼 공기와 그 주위로 둥글게 반사되는 빛무리, 춤을 추듯 사정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상은 쌓아올린 붓터치에 의해 얼룩진 땀처럼, 때로는 물결치는 파도처럼 종이 위에 맺힌다. 이 불확실한 항해의 제스처는 흐르던 것들을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세우기도, 정지되어 있던 것들을 앞으로 밀어 나르기도 하며 강제적 결속이 아닌 느슨한 공명의 여파 안에서 자아와 풍경을 함께 꿰어 조형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작가만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보다 앞서 “풍경이 이야기한다”는 표현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 궁구해본다면, 가능한 답변의 기저에 있는 작가의 공통된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다. 그것은 시간이란 이야기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당위성에 근거한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아가는 흐름을 가졌기에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삶 속에 내재한 플롯. 새삼 그 순간에 그곳에 있었기에 들을 수 있었던 대단치 않은 목소리이자, 해와 달을 살찌웠다 야위게 하고, 절기마다 다른 별자리로 하늘을 수놓는 보이지 않는 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목소리와 힘은 “마음대로 잡히지 않아 아름답”4)고, 작가는 그리기로서 이 아름다움을, 발화를, 의지를 무한정 연장하고자 한다. 이것이 김옥정의 작업에서 시간과 이야기, 그리기가 갖는 상관관계이다. 작가에게 그리기란 일상의 덧없는 경험에 서사 구조를 덧입혀 의미에 이르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무의미의 충만함이 어디까지 전개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막연한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작가는 세상이 우리에게 문득 속삭인 이야기의 파편들, 시간의 압력에 의해 빠르게 흩어지는 그 낱말 조각들을 다시 배치해 새로운 문장을 구성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그의 그림은 모든 이가 궁금해하지만 묻기를 주저하는 질문과, 지연되었지만 성실하게 고안된 답변 사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경로를 주파해낸다.
전시장 벽을 따라 걸려있는 그림들 속의 풍경을 나는 현실에서도 몇 차례씩 마주한다. 생존을 위해 시작했던 걷기는 이제 일상의 일부가 되어, 삶의 많은 부분이 걷기에 의해 촉발되고 또 종결되기도 한다. 그렇게 걸어가듯 살아가는 시간은 낮이면서 밤인 시간이었고, 도착지와 출발지가 이어져 있는 여정이었으며, 그 여정은 가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여정과 맞물리면서 세상의 외양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주기도 했다. 이처럼 밖에서 보이는 것들이 나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합류하였을 때, 그러니까 외양 중 어떤 것이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내 안의 길을 따라 흐르”5)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배회하며 흘려보낸 시간만큼의 아름다움을 간신히 잡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서, 멀리서, 순서를 정해두지 않고 그림들 사이를 지나가 보자. 그리하여 김옥정이 그려낸 풍경 앞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잘 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러다 우연히 얼마 전 살아낸 것과 같은 풍경을 목격한다면, 그리고 그 풍경이 실은 수많은 세월을 견뎌온 그러한 풍경이라면, 당신도 풍경도 잘 “지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것이 적어도 일상에 대한 의심을 그림에 대한 확신으로 바꾸며 지내온 작가의 시간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되리라 기대하며.
2) 필리프 자코테, 『초록 수첩』, 류재화 옮김(서울: 난다, 2025), 11.
3) 전시 기획안 참고
4) 필리프 자코테, 같은 책, 44.
5) 같은 책, 215.